본문 바로가기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응원봉에서 의사봉으로

화사 작가님은 잦은 지각으로 저에게 술을 사시게 되었답니다~^^ [편집자주]

 

응원봉에서 의사봉으로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평론가이자 전기 작가, 역사가였던 앙드레 모루아와 뉴욕에 위치한 세계적인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 박물관은 <샤를로트 뒤 발 도네의 초상>(1801년경)에 대해 각각 이렇게 극찬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완벽한 회화

간소한 것을 선호하는 그 시대 취향의 예시

 

<샤를로트 뒤 발 도네의 초상>, 1801년 살롱전 출품작,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수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신고전주의 대표 화가로 손꼽히는 자크-루이 다비드(202410월호-‘위대함이라는 콩깍지 벗어내기 -참고)의 그림으로 알았기 때문이지요. 비평가들과 대중의 극찬에 힘입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샤를로트 뒤 발 도네의 초상>1922년에 20만 달러에 구입했고,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50억 원입니다.

 

하지만 그림값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합니다. 1951년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자크-루이 다비드가 아니라 콩스탕스 마리 샤르팡티에(Constance Marie Charpentier, 1767~1849)의 그림이라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예술사가이자 루브르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찰스 스털링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여류 화가의 그림이라니, 소장 가치가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또한 완벽한 회화라 칭송받던 이 그림은 조형적이라기보다는 시적이고 문학적이며 매우 분명한 매력과 교묘하게 감춰진 연약함, 수많은 미묘한 장치들로 미루어 볼 때, 여성적 기질을 드러내는사례로 바뀝니다. 그럼에도 콩스탕스 마리 샤르팡티에는 당대 최고의 여성 초상화가였다는 평가를 받게 되고요.

 

콩스탕스 마리 샤르팡티에, <우울>, 1801년, 캔버스에 유채, 130×165cm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메트로폴리탄은 1977년에야 화가의 이름표에서 다비드의 이름을 제거했고, 1980년에는 콩스탕스 마리 샤르팡티에도 아닌 프랑스 무명작가로 바꾸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여성 초상화가여도 그 유명한 자크-루이 다비드가 아니면 무명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은 다시 바뀝니다. 18~19세기의 프랑스 여성 예술가에 대해 연구한 미술사가 마거릿 오펜하이머(Margaret Oppenheimer)1995년에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마리 드니즈 빌레르(Marie-Denise Villers, 1774~1821)였다고 밝혀냈거든요. 그림의 배경은 19세기 초 여성 미술학도들의 아뜰리에로 사용되던 루브르의 한 갤러리 안이고요.

 

2011년 미술사학자 앤 히고넷은 이 그림을 마리 드니즈 빌레르가 자화상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신발 끈을 매는 예술가의 자화상이라고도 불리는 <실물을 보고 그린 여성 습작> 속 여성의 얼굴과 닮았다는 근거를 들면서 말이죠.

 

마리 드니즈 빌레르, <실물을 보고 그린 여성 습작>, 1802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

 

과거 여성 화가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젤 앞에 있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데요, 여성 모델을 뮤즈라고 칭송하면서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상상 속 완벽한 여성을 그려냈던 남성 화가들과 달리 인물을 관찰하여 그렸다는 사실을 강조한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전시였던 살롱전은 소수의 엘리트 남성 화가들이 실력을 뽐내는 그들만의 리그였고, 프랑스 혁명 이후 1791년에서야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아니어도 살롱전 출품이 가능해졌어요. 하지만 1801년 마리 드니즈 빌레르가 <샤를로트 뒤 발 도네의 초상>을 출품했을 때 그림에 직접 자신의 이름을 써넣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탓에 그림이 제 이름을 찾기까지 195년이 걸린 것이지요.

 

마리 드니즈 빌레르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 화가들처럼 다행히 화가의 딸로 태어나서 그림을 배울 수 있었고, 대부분의 여성 화가들과는 다르게 결혼 후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 외에 밝혀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마리 드니즈 빌레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1816년

 

그녀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은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았던 남성 화가 앙투안 장 그로의 그림으로 둔갑하여 모델의 이름보다 남편의 그늘에 묻힌 <앙굴램 공작부인>라는 제목으로 위키피디아에 나옵니다. <샤를로트 뒤 발 도네의 초상>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자크-루이 다비드의 그림으로 왜곡되어 몸값만 불리고 있었을 게 분명해요.

 

역사 속 수많은 성취가 특정한 이름들만으로 기록되어 왔습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는 여성의 재능과 노력이 자주 무시되거나, 심지어 남성의 이름 아래 숨겨졌고요. 하지만 한때 위대한 남성 화가의 작품이라 여겨졌던 명화들이, 알고 보면 그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여성의 손에서 탄생한 경우가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 반복되는 지워짐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배제와 편향이 만든 구조적인 결과입니다. 예술의 역사는 그 자체로 권력의 기록이고, 우리는 그 권력의 이름 아래 누가 사라졌는지를 끝까지 물어야 합니다. 혹한 속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으며 광장을 지켰던 여성/청년들에 대한 호명과 그들의 내었던 다양한 목소리가 내란범 우두머리 파면 이후 꽁꽁 숨겨진 작금의 사태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뛰는 여성 정치, <응원봉에서 의사봉으로> / 여성 정치를 염원하고 응원하는 달리기 크루가 2025년 5월 3일 여성마라톤에서 찍은 사진

 

이제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그림의 주인이 마리 드니즈 빌레르라고 당당히 표기되어 있듯이, 내란 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앞장섰던 다양한 소수자들이 의사 결정권을 가진 정치적 주체로서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압도하는 시대에, 유명 논객과 수많은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방송에서 만들어내는 프레임 안에서 휘청일 것이 아니라, 응원봉을 들었던 손들이 의사봉을 들 수 있게 하기 위한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