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에는 넷플릭스 컨텐츠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주] |
용주골의 ‘헌트릭스’에게 떼창의 힘을!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유행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저도 이번에는 궁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팬덤 문화야말로 제가 잘 모르는 영역이기 때문이지요. 시간을 내어 넷플릭스 1위 영화를 본 결과, 진부하고 단순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케이팝 문화의 감각을 최고로 뽑아낸 유려함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년 여성 셋이 ‘헌트릭스’라는 걸그룹으로 활동하며 춤과 노래로 악령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팬을 비롯한 세상을 지켜낸다는 컨셉은 언뜻 쌩뚱맞지만, 개연성이 있습니다. 응원봉을 든 청년 여성들을 필두로, 비상계엄을 통한 독재 시도에 맞서 민주주의 광장을 지켜낸 것이 바로 얼마 전이니까요.
극의 주인공이자 ‘헌트릭스’의 리더인 ‘루미’는 기성세대의 이분법적 사고나 당위적인 태도를 넘어서고, 양육자가 감추거나 숨기라고 억압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드러내면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억압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는 설정이지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본 후, 기존의 기준으로 진지하게 평론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면서 여러 생각이 떠올랐답니다. 영화 속 유능하고 화려한 여성들과 정반대의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을 담은 그림 몇 점도 스르륵 떠올랐고요.
먼저 정정엽 작가님의 <집사람>입니다. 그림 속 여성은 제목과 달리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벽보를 들여다봅니다. ‘바깥양반’이 집 밖에서 돈을 벌어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역할을 한다면, 집 안에서 자녀 양육과 유지관리 역할을 전담하는 사람을 ‘집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왜 ‘집사람’이 아이 둘을 데리고 나와 일자리를 구해야 할까요?
‘가장’인 남성 혼자 가족 전체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가능한 경우는 사실 매우 드물었어요. 여성과 남성은 함께 일해왔습니다. 산업화와 함께 공/사 영역의 구별이 뚜렷해지면서 여성들의 노동은 낭만화되는 동시에 비가시화되고,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생긴 것이죠. 여성들이 남편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팔자 좋은 여성’을 부러워했던 것은, 그렇지 못한 여성이 많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림 속 여성과 같이 ‘독박 돌봄’을 하면서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여성의 노동은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반찬값 번다’거나 ‘아이들 학원비 보태려는 것’으로 축소되고 폄하되었어요. 가족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돌봄’ 노동이나 가정의 ‘유지관리’ 노동, 관계를 위한 ‘감정’ 노동 등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면죄부로 남성에게 ‘생계부양자’의 자리를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에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형식미를 추구하거나 노동자와 민중을 남성으로 재현할 때, 여성주의 미술가들은 여성이 겪는 부조리와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을 그려냈습니다. 그중에서도 초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인순 작가님의 1999년 작 <여성해방 노동해방>은 조금 더 현대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역할을 하는 여성들의 모습 사이사이로 쓰인 구호 중, 깃발 든 여성의 팔 위아래로 쓰인 문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읽는 방법에 따라 ‘성 차별 없는 노동 세상’이 될 수도 있지만, ‘성 노동 차별 없는 세상’으로 읽을 수도 있지요. 정부 정책과 여성인권운동의 역학관계 속에서 ‘성 노동’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순간 말 그대로 큰일이 나기도 하는데요, 김인순 작가님의 다른 작업을 보면 ‘성 노동’이라 읽어도 되겠다 싶습니다.
2004년작 <땅에는 천의 여성이>에는 거대한 낙엽이 쌓인 주홍빛 공간에 여성들이 있습니다. 두 손을 모아 무언가를 쥐고 있는 듯 보이는 중앙 상단의 노년 여성과 함께 둥근 형태로 배치된 여성들이 보입니다. 시계 방향으로 보면, 가정폭력에 노출된 새색시, 투쟁하는 공장노동자, 침탈당한 모습의 여성, 업소 공연자, 전통 연희자, 슬립(slip)만 입고 선 여성과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댄 여성, 어머니와 딸, 한복에 버선발로 춤을 추는 여성이 보입니다.
현실의 여성은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서양의 누드화는 ‘천상의 완벽한 여성’으로 재현하지만, 땅에 살아가는 여성은 천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서양의 이성애자 남성 권력자들이 보고 싶어 했던 여성은 싱그러운 자연 속에 그려진, 자연처럼 모든 것을 내어놓을 것 같은, 사실은 착취해도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이라는 환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존하는 여성은 이 고된 현실에서 각양각색으로 살아갑니다.
간간이 초록 잎과 노란 꽃이 보이기는 하지만, 생명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낙엽과 흙 뿌리 사이에 선 여성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된 현실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을 신었든 신지 않았든 대부분의 여성은 발이 보이지만, 가장 크게 그려진 노년 여성과 속옷 차림으로 안고 있는 두 여성은 땅속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발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노년 여성과 서로 외에는 의지할 데 없는 헐벗은 여성들이 사실은 이 세계의 양분이었다는 의미 아닐까요?
오랜 세월 국가가 장려하고 육성해온 ‘성 산업’에 종사하지만, 그 이유로 모습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면 안 되었던 여성들. 아무도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아, 서로의 목소리에 귀기울 수밖에 없던 여성들. 그 덕에 목소리를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여성들. 여성을 거름 삼아 쑥쑥 키워온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 이들이 낙인과 차별과 배제와 폭력에서 해방되어야 모든 여성과 노동자가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 김인순 작가님의 메시지 아닐까요?
성 노동자 ‘별이’와 인권활동가 ‘여름’이 지난해 4월 파주시 공무원 앞에 무릎을 꿇고 ”말 좀 들어달라“고 애원하며 바짓가랑이를 잡은 것이 ‘공무집행 방해’가 되었습니다. 용주골에서 살며 일했던 여성들의 존재와 삶을 지우며 강행되는 ‘개발’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막고자 했다가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성을 착취하는 ‘성 산업’을 발판 삼아 성장한 대한민국이 종사자를 ‘불법적인 존재’로 만들더니, 그들의 목소리마저 ‘불법’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영화의 세계관에서 ‘헌트릭스’가 아무리 열심히 노래를 불러도 악령의 목소리에 매혹되는 사람들이 영혼을 빼앗깁니다. 개인의 상처나 자책, 모순을 건드리는 악령으로부터 사람들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헌트릭스’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는 노래를 부르지만 부족합니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떼창’으로 ‘헌트릭스’의 노래를 함께 부를 때에야 악령을 막을 수 있는 안전망 ‘혼문’이 완성됩니다.
이제는 ‘창녀’로 살아야 했던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창녀’를 필요로 하면서 모든 여성에게 ‘성녀’가 되라고 강요했던 권력에 맞서고, 감추었던 진실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합니다. 자본의 논리와 현실을 가리는 악령의 목소리 대신, ‘성녀’ ‘창녀’ 이분법을 넘어서 자신으로 살고자 내는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함께 ‘인권’이라는 안전망을 완성해나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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