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상담 이야기>는 다음 화에 마무리됩니다! [편집자주] |
열한 번째 이야기, 사박이 벽, 고립된 권리
: 전신불수가 된 노동자 가족의 분투기
조광복
(전)청주노동인권센터 상담활동가
1.
“집회 좀 열어주씨요. 억울해서 못 살겠소” 상윤 씨 모친이 첫 대면에 다짜고짜 꺼낸 말이었습니다. 억센 경상도 억양으로 서류 한보따리를 풀었는데요, 막내아들 상윤 씨의 재판기록이었습니다.
전신불수가 되어 8년을 병상에 누워 있는 상윤 씨를 대신해서 모친이 변호사를 선임해 역시 8년 가까이 치른 재판 결과는 최악이었습니다. 발명명 ‘뇌염’을 산재로 인정받자고 요양신청부터 시작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진행한 행정소송 대법원 ‘패소’ 확정,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 손해배상청구소송 대법원 ‘패소’ 확정, 거기다 산재신청 과정에서 회사가 증거를 조작했다고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고소 및 형사소송 역시 대법원 ‘패소’ 확정.
나는 며칠 뒤 모친에게 서류뭉치를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사정은 딱하신데요, 아무리 봐도 도와드릴 방법이 없네요.”
6개월이 지났습니다. 모친이 다시 찾아왔어요. “제발 좀 도와주씨요. 잊을라 해도 안 잊어집니더. 억울해서 잠을 못잡니더. 병원 치료비도 다 떨어졌습니더. 우리 좀 살려주씨요.”
며칠을 생각하다 상윤 씨 가족을 돕기로 했는데 억울해할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2.
상윤은 M반도체 회사에서 가스 공급 설비를 유지·관리하는 엔지니어로 일했습니다. 입사한 지 9년이 됐고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습니다. 젊고 성실하고 안정된 직장과 거기다 약혼자까지, 상윤의 앞날은 평탄해 보였어요. 그러다 직속 상급자가 퇴직했습니다. 인력은 새로 충원되지 않았으므로 상윤의 업무가 크게 늘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재판 기록에 첨부되어 있는 약혼자의 진술 내용에 따르면 밤늦게 퇴근하는 일이 잦아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7개월이 지나갔어요. 상윤은 회사 차원의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발작 증세를 보이다 의식을 잃고 병원에 후송되었어요. 검사 결과는 ‘바이러스성 뇌염’이었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언어 능력을 잃고 전신 마비 상태가 됐습니다.
‘바이러스성 뇌염’은 뇌실질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염증이 생긴 질환을 말하는데요. 증상으로 두통, 발열, 오한, 구토, 의식 저하, 혼미, 시력 저하, 경련 발작 등이 있습니다. 예후가 좋지 않을 경우 사망할 수도 있고 언어능력 상실, 마비 등 심각한 후유증이 뒤따를 수도 있어요.
뇌염이 과연 산재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만 법원 판결은 업무상 과로 및 스트레스와 바이러스성 뇌염의 인과관계를 인정해 왔습니다.
서울고등법원 2005. 9. 28. 선고 2004누24006 판결 [요양불승인처분취소]
... 비록 의학적으로 과로 및 스트레스와 바이러스성 뇌염 사이의 확립된 인과관계가 정립된 것은 아니나 심한 과로 및 스트레스로 인하여 신체의 면역능력이 현격하게 떨어져 있을 때 위와 같은 바이러스가 활성화되어 이 사건 상병이 발생할 개연성을 부정할 수는 없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 상병은 원고의 업무상 과로 및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상윤의 가족은 상윤을 대신해서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접수했습니다. 그러나 이들한테는 자료가 없었습니다. 상윤과 동거했던 약혼자는 상윤의 상급자가 퇴직한 이후 21시 30분에서 22시 사이에 퇴근하는 일이 많았다고 확인했습니다.
3.
회사는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상윤의 가족은 회사 사람들과 완전히 격리됐습니다. 즉, 회사에 근무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어요. 결국 산재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처분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법적인 이의절차를 거치면서 회사가 제출했던 자료와 회사 측의 진술을 비로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가 제출한 자료 중 발병 전 3개월 치의 근태현황이 있었습니다. 엑셀 파일에 저장해서 출력해 놓은 듯한 자료였어요. 아니면 급여 계산 프로그램과 연동된 자료일 수도 있습니다. 근태현황으로는 연장근로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약혼자가 확인한 사실과는 동떨어진 내용이었어요.
상윤의 가족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요양급여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피고가 된 근로복지공단은 회사에 근무하는 관리자들을 증인으로 내세웠어요. 그들은 주로 상윤한테 불리하게 증언했는데요, 그런데 법정 심문 도중 관리자의 입에서 ‘(상윤이) 야근을 했었다’는 진술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이 증거로 제출한 회사의 근태현황에는 야근 내역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어요.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상윤의 출퇴근 시각이 포함된‘원시자료’ 즉, 최초의 데이터를 제출받는 것입니다. M반도체는 직원들에게 ID카드를 부여해서 그것을 출입구 전자인식기에 인식을 시키도록 하여 출퇴근을 관리해 왔습니다. 이 ID카드 인식 기록은 함부로 폐기할 수 없습니다. 기술이 유출되었을 때 유출 경로를 수사 의뢰하기 위해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지요.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 ‘첨단기술 및 제품’에는 반도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송 원고인 상윤 측은 법원에 ‘사실조회신청’을 통해 ID카드 사용내역을 회사가 법원에 제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법원이 그 신청을 받아들여 M반도체에 통보했는데 회사는 해당 문서를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행정소송 1심에서도, 2심에서도 M반도체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상윤 측 가족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날 때까지도 과로 여부를 판단할 결정적인 자료인 ID카드 사용 내역을 확인하지 못한 겁니다.
변호사의 말로는 ‘M반도체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행정소송에서 제3자이기 때문에 문서를 제출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이렇게 행정소송은 허망하게 끝났습니다. 이미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난 이상 그에 반하는 민사소송, 형사소송의 판결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모든 소송이 끝났습니다. 상윤은 8년을 병상에 누웠고 가족은 8년을 허송세월로 보냈습니다. 상윤의 모친은 얘기했습니다. “그 아이디카드 내역이란 걸 받아보고 안 됐으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지는 않았을 깁니더.”
4.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상윤은 법의 보호를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법의 높은 장벽에 가로막혔습니다.
근로복지공단에 최초 요양급여 신청을 접수했을 때로 돌아가 볼까요? 산재로 인정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공단 담당자는 산재 인정 여부의 핵심 사실이 되는 연장근로에 관하여 신청인 측과 회사 측의 주장이 정반대인 것을 확인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공단 담당자는 신청인 측에게 ‘회사가 근태현황을 제출했는데 거기엔 연장근로가 많지 않다.’ 즉 양쪽의 주장이 상이하다, 라고 말하는 게 상식 아닐까요?
그리고 ‘신청인 측이 제출한 자료가 없으니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회사가 제출한 근태현황 자료를 토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장이 너무 다른데 신청을 한 쪽 입장은 배척하고 신청인이 아닌 회사의 입장을 받아들여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상윤의 가족은 그런 근태 자료가 제출된 사실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신청인과 재해 발생 사업장의 주장이 상이한 경우 처분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이 그 사실을 신청 당사자인 재해 노동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법적 의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근로복지공단과 재해를 입은 노동자 사이의 벽이 생각보다 높습니다.
행정소송의 장벽도 높았습니다. 업무상 질병을 다투는 노동자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을 때 중요한 자료들을 보유한 쪽은 대부분 회사입니다. 제3자라서 제출하도록 강제할 수 없게 된 회사는 사실은 소송 과정과 결과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워두는 게 보통입니다. 특히 작업환경 이슈에 극도로 예민한 반도체 사업장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때로는 근로복지공단의 승소를 위해서 증인을 보내주고 증거물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M반도체처럼 말이지요. 제3자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제3자 행세를 할 수 있도록 법으로부터 배려 받는 것입니다.
회사가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했던 상윤의 ‘근태현황’이 연장근로 내역을 누락한 자료였다고 가정해보지요. 상윤과 그 가족에게는 엄청난 일일 것입니다. 그러고도 회사에 아무런 불이익이 없다는 게 가능할까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116조(사업주 등의 조력)은 보험급여 청구 과정에서 사업주의 조력 의무 등을 두고 있지만 그것을 안했다 해서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공단 소속 직원이 사업장의 관계인에게 질문을 하거나 관계 서류를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규정하고 있는데 회사 관계인이 답변을 거부하거나 조사를 거부ㆍ방해 또는 기피하였을 때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의 처벌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약간의 과태료 정도로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근로복지공단이 과연 이 처벌규정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아무튼 이 규정마저 상윤 씨 가족을 비켜갔습니다.
상윤 씨와 가족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보호를 받자고 법에 호소하는 길을 택했지만 정작 법과 재해자 사이를 가르는 경계는 높은 장벽이 됐습니다.
5.
상윤 씨에게는 또 다른 장벽이 있었습니다. 근로기준법이 보호하는 권리로부터 배제됐고 노동조합으로부터도 배제됐습니다.
회사가 제출한 근태현황은 정말 연장근로를 누락한 것일까? 보통 회사가 관리하는 출퇴근기록과 임금은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연동되어 있습니다. 규모가 큰 기업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회사 내에서 상윤의 업무는 사무직군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사무직군은 생산직과 달리 연봉제를 택하고 있었지요.
특이하게도 임금 내역에 ‘교통비1’, ‘교통비2’ 항목이 있었습니다. 회사는 사무직군 근무자들이 21시 30분까지 일하면 ‘교통비1’을 지급하고 23시 30분까지 일하면 ‘교통비2’를 지급하는데 말 그대로 택시비 정도의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21시 30분 이전에 퇴근하면 ‘교통비1’은 아예 지급되지 않았고 23시 29분에 퇴근하면 21시 30분 퇴근한 것과 같은 금액인 ‘교통비2’를 지급했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점점 명확해졌습니다.
상윤의 산재처리 과정에서 회사가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근태현황과 임금대장을 보면 21시 30분 및 23시 30분의 퇴근 내역만 있지 21시 29분까지 근무했거나 21시 31분부터 23시 29분까지 근무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21시 20분에 퇴근했다면 그냥 18시 정시 퇴근이 될 것이고 23시 20분에 퇴근했다면 21시 30분까지 근무한 게 될 것이다’
회사에서는 보통 사무직군의 연장, 야간근로를 세심하게 관리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연봉액 안에는 이를테면 고정 연장근로수당액이 포함되어 있어서 실제의 연장근로시간과 상관없이 늘 고정금액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특성을 가진 사무직군에서는 연장근로시간을 정확히 계산해야 할 필요를 못 느낄 수 있습니다. 상윤의 회사도 그랬을 것입니다. 이런 임금계산 방식을 위법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실제 연장근로한 시간이 지급된 수당액보다 많을 경우 회사는 덜 지급한 수당 차액분을 지급해야 합니다. 이 차액분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당연히 연장, 야간, 휴일근로시간을 보고 확인합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근로기준법이 마련한 규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임금대장 등 근로계약에 관한 중요한 서류를 3년간 보존하도록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임금대장에 연장, 야간, 휴일근로시간수를 적도록 한 것입니다.
상윤의 회사 M반도체가 사무직군 근무자에 대하여 기재한 것은 연장, 야간근로수당을 산정하기 위한 실제의 연장, 야간근로시간수가 아니고 교통비1, 교통비2를 산정하기 위해 21시 30분, 23시 30분을 표준으로 임의로 가공한 근태현황이었던 것입니다.
기술직인 상윤은 담당 업무가 사무직군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그런 출퇴근 관리 방식을 적용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상윤과 동거했던 약혼자가 확인한 것처럼 21시 30분에서 22시 사이에 퇴근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면 퇴근할 때 ID카드를 체크한 시각은 21시 30분 직전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회사가 가공한 근태현황에는 18시 퇴근으로 처리되었을 것입니다. 실제 연장근로시간수를 임금대장에 기재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불법입니다.
상윤의 최초 요양신청 때 회사가 제출한 자료는 이와 같이 사무직군에 대하여 임의로 가공한 근태현황이었던 것입니다. 처음엔 무심결에 제출했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엔 임금 프로그램에 연동되어 입력한 근태 자료가 없었을 테니 말이죠. 그러나 이후 회사가 이의신청 및 소송절차에서 모르쇠로 일관한 태도는 아주 못돼먹은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상윤은 노동조합 조합원이 되지 못했습니다. 노사가 맺은 단체협약에서 사무직군을 조합원 자격에서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조합원에서 배제된 상윤은 근로기준법이 정한 초보적인 권리에서도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산재 처리 과정에서도 노동조합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상윤의 가족이 여러 방법으로 억울함을 호소했을 때도 노동조합은 말 한 번 걸지 않았습니다. 건강했을 때는 회사의 충복이었지만 건강을 잃고 쓰러져 가족들이 권리를 행사하려 하자 가엾은 상윤은 무관심과 냉담의 장벽에 갇힌 것입니다.
6.
법에 호소하는 길은 막혔지만 다행히도 ‘연대’의 손길이 가족을 살렸습니다. 상윤과 가족의 억울함에 공감한 종교인들이 발 벗고 나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방송사와 언론사에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며 매일 회사 앞에서 가족과 함께 피켓시위를 했습니다. 집회도 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해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결국 회사는 대화에 나섰고 상윤의 가족은 회사와 합의했습니다. 나중에 듣기로 상윤의 건강도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합니다.
충직했던 사원이 쓰러지고 그 가족이 노동자의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나서자 갑자가 사방의 경계가 장벽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과 가족의 권리가 고립되고 그 대가는 너무 가혹했습니다.
무관심과 냉담의 장벽은 사람을 고립시키지만 공감과 연대는 사람을 연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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