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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미술사가 담지 못한 그림 이야기] 여성에 대한 외모 품평과 여성혐오

 

여성에 대한 외모 품평과 여성혐오

 

이충열(화사)

여성주의 현대미술가

 

드디어 내란수괴 윤석열과 그의 힘을 등에 업고 부당한 권력을 휘둘렀던 배우자 김건희가 구속되었습니다. 시민의식을 가진 보통의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않을 다양한 위법을 행하고도 파렴치한 거짓말을 끝없이 늘어놓는 두 사람의 모습에 기가 막히지만, 최근 언론에 공개된 내란수괴 배우자의 모습에 대한 반응에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아무리 대통령실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외모를 과시하는 사진을 전국민에게 선보인 과거가 있다 해도, 외모 변화에 대한 온갖 추측이나 부어오른 얼굴과 주름진 손을 대비시켜 조롱하는 등의 행위는 부당한 일이지요.

 

여성이 외모로 환원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여성에 대한 험담에는 외모에 대한 비난이 항상 따라붙어 왔고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아름다움은 의무나 다름없고, ‘추함은 죄악으로 여지는 것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외모를 둘러싼 혐오와 권력관계의 긴 역사를 추적한 책 못생긴 여자의 역사(크로딘느 사케르 지음, 김미진 옮김, 호밀밭, 2018)의 표지로 선정된 그림은 추함이라는 단어가 나이 듦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퀸틴 마시스, <기괴한 노부인>, 1513년, 목판에 유채, 64 × 45.5cm

 

과한 모자와 머리 장식에 가슴이 깊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코르셋에 의해 가슴의 주름이 도드라지는 노년의 여인을 그린 이 그림은, 나이 든 여인이 젊은 여인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풍자하기 위한 의도로 그린 것이라는 설명이 붙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풍자(諷刺)의 뜻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풍자는 특정 대상을 직접 비판하지 않고 과장이나 비꼬기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유머러스하게 지적하거나 폭로하는 표현 방식으로 권력이나 권위에 대한 조롱이나 냉소를 담고 있는 것인데,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나이 듦에 따라 권위를 획득하게 되지만 여성의 나이 듦은 권력을 상실케 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3대 천재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480~90년에 그렸던 그로테스크한 얼굴 드로잉 중 하나를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온갖 다양한 인물들을 관찰하고 연구했던 기록 중 하나라는 것이지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_런던 왕립 컬렉션에 있는 드로잉

 

과거의 그림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엇도 사실이라고 확신하기 어렵지만, <기괴한 노부인>을 그린 마시스가 나이 든 여성이 젊은 여성처럼 꾸미는 것을 혐오했다는 사실은 그림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시스의 친구이자 인문주의자들의 왕자라는 칭호를 누렸던 에라스뮈스도 그의 책 우신예찬에서 "여전히 요염한 짓을 하는", "거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역겹고 말라붙은 가슴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늙은 여자들을 미쳤다며 조롱했습니다.

 

(좌) 한스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뮈스, 1523년 / (우) 청년기의 쇼펜하우어, 1815년

 

"여성은 여성의 목적인 인간을 낳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한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처럼 여성을 단지 생식의 도구로 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생식 능력을 상실한 여성은 더 극심한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림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철학적 질문을 던졌던 고야 역시 나이 든 여성을 그렸습니다. 바로 1812년 작 <늙은 여자들의 시간>입니다. 화려하게 꾸민 모습의 두 여인이 거울을 보고 있는데, 흉측한 얼굴로 재현했습니다. 그들의 뒤에는 죽음의 사자가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거울 뒷면에는 '어때?(Qué tal?)'라는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늙은 여자들의 시간>, 1812년, 캔버스에 유채, 181 x 125 cm

 

이 그림에는 노년을 맞이한 고야가 인간의 노쇠함과 죽음을 성찰하는 작품이라는 해석이 따라붙지만, 왜 자신의 성찰을 여성의 모습을 통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성을 성별은 다르지만 고유한 인격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도구로 인식할 때만 가능한 발상이지요.

 

마시스와 에라스뮈스, 고야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나이 든 여성은 쉽게 조롱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늙은 남성이 젊은 남성을 기준으로 하는 남자다움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에는 왜 관대할까요?

 

여성에 대한 혐오는 우리의 문화 속에 깊이 자리 잡아서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도 자유로올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여성 역시 다른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간주하거나, 남성이 여성보다 우수할 것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모든 남성 화가가 나이 든 여성을 혐오스럽게 묘사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회에 존재하는 여성 혐오적 통념을 투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충실히 관찰하고 묘사한 그림도 있습니다. 바로 발타자르 데너가 1721년에 그린 <늙은 여인의 초상>입니다.

 

발타자르 데너, <늙은 여인의 초상>, 1721년

 

화가의 성실한 노동이 모델에 대한 태도와 감정을 드러냅니다. 이 그림에는 긴 세월을 살아낸 이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느껴집니다. 나이 듦을 추하게 여기는 통념도, 여성혐오도 이 섬세한 그림에는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내란수괴의 배우자 김건희가 저지른 잘못은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부당 이익을 취한 것에 있지,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젊어 보이는외모를 하기 위한 적극적 실천에 있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과 다르거나 아름다움의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개인을 조롱하기보다, 성형과 다이어트와 비싼 의상과 장신구 등을 욕망하게 만드는 구조와 그 욕망을 성공적으로 성취한 자를 선망하고 칭송하는 것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여성에게 보기 좋은 이미지로서 존재하기를 요구하는 잘못된 문화를 함께 깨부수고, ‘아름답다는 단어의 어원처럼 모두가 자기다울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