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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트랜스젠더는 언제까지나 ‘경계 위’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웹진 [e-품]의 <PRISM> 꼭지는 노동과 이어지는 다양한 사회운동과 관련한 내용을 싣습니다. 이번 글은 얼마 전 육군 변희수 하사의 강제전역과 숙명여대 합격자 A씨의 입학포기로 불거진 우리사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에 대한 글을 싣습니다. 어려운 부탁에도 기꺼이 글을 기고해주신 리나 활동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편집자주]

 

트랜스젠더는 언제까지나 ‘경계 위’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리나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활동가

 

  한국군 최초로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부사관이 등장했다. 트랜스여성인 변희수 하사는 소속 부대의 지지를 받아 의료적 트랜지션을 마쳤고, 여성으로서 군복무를 지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군 당국은 변 하사의 법적 성별변경에 대한 법원 결정이 나올 때까지 전역심사를 연기하라는 인권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전역 처분을 내렸다.

 

  숙명여대 합격 소식을 밝힌 트랜스여성 A씨의 이야기도 언론을 타고 알려졌다. A씨는 변희수 하사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히며 자신의 합격 소식이 다른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입시를 준비하며 크나큰 수술도 동시에 받아야 했고, 기약 없는 법적 절차까지 거치는 과정을 겪고 나서 지망하는 대학에 합격한, 어떻게 보면 미담과도 같은 합격 수기일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트랜스젠더라는 단어에만 주목했다. 숙명여대 내부의 입학 반대의 목소리들을 열심히 보도하고 마이크를 쥐여 주면서 래디컬 페미니즘 vs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는 페미니즘등의 대결 구도를 그려냈다. A씨는 결국 혐오 여론에 대한 부담감으로 입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여성혐오 범죄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만이 모인 공간은 성별이분법적인 분리로 안전함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변 하사 강제전역 사건과 A씨의 숙대 입학 포기 건의 트랜스혐오는 모두 여성 고유의 공간을 침범하는 침입자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트랜스여성임을 자칭하며 여성의 공간을 침입하는 남성이 있을 것이란 의심과 함께, 이러한 트랜스혐오는 더더욱 힘을 얻는다. 가장 성별이분화된 공간 중 하나인 군대 내에서 남군으로서 복무했던 이가 여군으로서 계속 복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여자 대학 내에서 자신이 트랜스여성임을 커밍아웃했을 때에, 이들은 자신들이 여성 공간 내에 존재할 수 있는지 그 진정성을 의심받고 또 증명해내야 한다.

 

  여성 공간이 안전함을 보장받아야 하는 이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이 끊임없이 안전함을 위협받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여성혐오 때문이다. 가장 큰 원인은 여성혐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트랜스젠더를 주목하고 있다. 여성 공간 내부의 트랜스여성은 안전한 공간에 존재 자체로 혼란을 일으키고 해당 공간이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공간 내의 구성원들이 처음으로 접해보는 이질적인 존재로 상상되고는 한다. 이렇듯 트랜스혐오는 실제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의 맥락은 제거한 채 여성 전용 공간을 위협하는 가상의 트랜스젠더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또 고정시킨다.

 

사진=pixabay

 

  변 하사 강제전역 사건과 A씨의 숙대 입학 포기 건에서 언론과 미디어는 이러한 전형적인 트랜스혐오의 이미지를 그대로 답습하고 또 재생산하고 있었다.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루는 기사에서는 위처럼 여성 기호와 남성 기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경계 위의 존재처럼 트랜스젠더를 묘사하는 삽화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한국은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변경에 있어 전문의의 정신과 진단서, 생식 능력 제거, 외부 성기 성형 등 각종 증빙서류와 의료조치를 요구함에 있어 전 세계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성별변경을 완료한 숙명여대의 트랜스여성 입학생 건에 대해서도 성전환 남성 입학 반대처럼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성별정체성이 아닌 지정성별만을 강조하는 혐오 언어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언론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성별정정을 마친 트랜스젠더만이 진정으로 성별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트랜스젠더를 다루는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삽화처럼, 성별의 경계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본 이들도, -바이너리나 젠더퀴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그 경계선 위에서 설명하는 이들도 많다. 시스젠더의 삶이 한 가지로 획일화되어 그려질 수 없듯이, 트랜스젠더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트랜스혐오가 만들어낸 고정된 이미지만을 주목하고, 더 나아가 여성 공간을 사수하려는 페미니즘 진영 vs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는 진영과 같은 구도를 그려내고 있다.

 

  그 무엇보다도 미디어의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더불어 미디어가 그려내는 이러한 트랜스혐오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당사자와 주변인들이 어떻게 정체성을 형성해오고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실제 삶의 맥락에 주목해야 할 때이다.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을 트랜스젠더 혐오의 순간이라 부르겠지만, 지금은 유례없는 가시화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라 말하고 싶다. 트랜스젠더는 어떤 모습으로던 언제나 우리 사회에 함께 존재해왔고, 가시화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트랜스젠더는 언론과 미디어가 그려내는 것처럼 영원한 침입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마냥 시혜적인 시선으로만 지켜보아야 하는 이들도 아니다. 2006년 대법원 결정례에 명시된 것처럼, 트랜스젠더 또한 헌법으로부터 보장받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고, 우리 사회에서 동등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들은 모두 각자 다양한 삶의 맥락을 가지고 점점 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 순간 우리 사회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과 어떻게 공존하며 함께 살아갈지는 페미니스트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